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징비록(드라마)/역사적 사실과의 비교 (문단 편집) === 제36회 === * 드라마에선 곽재우가 김수에게 부산에서 유격전을 벌일 것을 제안하나 거절당하자 관직을 버리고 의병장 신분으로 유격전을 벌인다. 그리고 나레이션은 다시 관직에 복귀하지 않았다고 소개했다. 이는 모두 사실이 아니다. 36회의 시간적 배경은 곽재우가 성주 목사에 취임한 이후고(1593년 4월 15일) 훈련도감이 창설되고(훈련도감 설치가 8월 14일, 사목 발표가 8월 22일이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1593년 8월 30일)되기 전이니 1593년 8월 중순 쯤인데, 이 무렵 곽재우는 관직을 때려치우기는커녕 경상우도조방장에 임명되었다(1593년 9월). 그 후로도 지속적으로 경상우도에서 왜군을 감시하고 삼가, 의령, 단성, 고령 등 낙동강 일대의 주요 산성들을 수축, 관리하는 일을 총괄했으며,(선조실록 1593년 12월 21일) 1594년 10월에 장문포 해전에 참가했고 12월 진주 목사에 제수되었다. 1595년까지 경상도에서 계속 군무를 수행하다 그해 말에 강화 회담에 불만을 품고 낙향했으며,(선조실록 1595년 12월 5일) 1596년 11월까지 병을 핑계로 조정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야인으로 묻혀지내다 정유년 말에 복직해 화왕산성을 수비했다. 전후에는 잠시나마 경상좌병사까지 역임했다. 또한 곽재우가 자주 낙향한 것은 관군과 의병 연합의 한계 때문이 아니라, 곽재우라는 인물의 성향 자체가 관직 생활과 맞지 않았을 뿐이다. 비슷한 시기에 영남에서 거병한 김면이나 정인홍에게는 이런 문제가 없었다. * 드라마에서는 내내 경상 감영 소속으로 묘사되는 김수는 1592년 8월 한성판윤에 제수되어 중앙으로 옮겨간다. 전쟁 초기 민심 이반의 책임을 물어 잠깐 파직을 당하기도 했으나 중국어에 능통한 점을 인정받아 명과의 외교 실무를 담당했다. * 송응창은 자신을 압박하는 명 조정에 대부분의 왜군이 본국으로 철수했고 고니시만 강화협상 마무리를 위해 '서생포라는 작은 섬'에 주둔하고 있다고 변명했다. 명 조정에도 왜군의 주둔실태가 알려졌기에 반신반의 하였으나 정철이 가지고 간 사은표문(한양, 개성, 평양을 수복한것에 대한 감사표명)을 보고 왜군이 물러갔다는 쪽으로 결론이 나 강화론이 힘을 얻게된다. * 정철이 사은사로 다녀온 후 탄핵을 받은건 사실이나, 관직에서 물러나게 된 것은 --기축옥사 때 어그로를 끈 동인들이 최영경의 억울함을 내세우며 반격한 탓-- 사은사로 간 자리에서 일본군이 경상도에 남아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철수했다는 가짜 정보를 흘렸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명나라 파병군에서 난리가 났었다.[* 최경영은 정철 사후의 이야기이다] 덧붙여 류조인은 감히 여기에 끼어들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 명군은 1593년 8월 10일 한성을 출발해 철수를 시작했다. 송응창과 이여송은 9월 13일 압록강을 건너 요동에 돌아갔다.[* 철수는 38회에서 이루어진다.] * 드라마에서 대간의 지지를 한 몸에 받는 실세로 등장하는 류조인은 출신 성분도 보잘것없었고 늙도록 과거에 급제를 못 했다. 음서로 겨우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나 이렇다 할 실권도 없었으며, 대간의 지지를 받기는커녕 실록의 사관평에는 대놓고 미천한 신분이라거나(선조실록), 학문이 불순했다고(선조수정실록) 되어 있다. 또한 과거시험장에 들어갈 수 있으면 개구멍으로 기어서라도 들어가겠다고 했다고 말한 일로 비웃음을 샀으며, 천거를 받아 형조참의까지 올라갔다가 1595년 12월 8일 별시 문과에 응시할 수 있도록 청해 윤허를 받았으나 '''대간들'''이 반대해서 반려되었다. 류조인이라는 인물은 애초에 선조실록과 수정실록을 탈탈 털어도 6번 나오는 인물에 불과하며, 그나마도 관직에 제수되었다거나 다른 사람의 추천을 받았다거나 하는 것이 대부분이고 정치적으로 의견을 제시한 것은 사노비 징집을 반대했을 때 한 번에 불과하다. 과거에 급제도 못 하고 추천을 받아 관직에 나간 것은 자랑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창피한 일로 여겨졌으므로 대간의 지지를 받을 입장도 아니고, 엘리트 코스를 걸은 유성룡과 감히 마주볼 수 있는 위치도 아니었다. 이런 인물이 후대에까지 언급된 것도 서인의 거두였던 [[박세채]]가 쓴 선비 평전에 포함되었기 때문일 뿐, 여기 실리지 않았다면 아주 잊힐 위인이었다. 끝으로 1595년 12월 류성룡의 정책에 반대하는 상소를 보면 전쟁에 아주 무식한 것이 드러나는데, 중국의 기술인 총과 포만을 중시하고 전통적인 무기인 궁시를 멀리해서는 안 되며 사노비를 군사로 동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유성룡은 이 상소를 가리켜 국가 위기 상황임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런데 제작진은 이러한 인물을 조선 대간의 정신적 지주로 그리고, 당시 사대부와 지주들을 그에게 동조하고 개혁 관료 유성룡에 반대하는 꽉 막힌 인물들로 묘사했다. 더불어 당시 70이 다 된 노인(1595년 12월 8일 기사 사관 평 참조)이었음에도 중년 배우를 쓴 것도 고증 오류.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